사회자 인야민殷亞敏 :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해珠海 문화 대강당 회의장에 왕림해 주신 걸 환영합니다. 강의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에 핸드폰을 진동으로 바꿔주시거나 꺼주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내빈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선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일찍이 노신魯迅 선생께서는 이 책을 ‘역사가의 절창이요, 산문체의 이소離騷다’고 평가한 적이 있는데요. 어떤 책일까요?(청중은 『사기)라고 대답한다.) 맞습니다. 어린이들도 『사기』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모두가 『사기』를 사랑하시는 분들인 것 같군요. 우리가 오늘 모시게 될 분이 바로 『사기』 연구의 전문가이십니다. 『사기전증』이 그분의 대표작이지요. 『사기전증』이 출판되기 이전의 70년간 『사기』 연구를 집대성한 책은 일본 학자 농천자언瀧川資言이 1930년대에 쓴 『사기회주고증史記會注考證』이었습니다. 중국 본토와 대만의 중국인들은 이 점을 난처하게 여겼지요. 1992년에 중국의 『사기』 연구 대가이신 바이서우이白壽彝 선생께서는 한자오치 교수님을 댁으로 불러 한 교수님께 정중하게 부탁하셨습니다. 10년의 시간을 들여 『사기』를 정리해 『사기회주고증』을 뛰어넘는 세계적 수준의 저서를 남기라고요. 약속을 천금처럼 여기는 한자오치 교수는 임무를 부여받은 후로 밤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12년 만에 『사기전증』이 마침내 출판되었지요. 전권이 580여 만 자로 글자수가 『사기』의 10배입니다. 사학계에서는 이 책을 불후의 거작이라고 부릅니다. 한교수님의 『사기』 강의도 마찬가지로 훌륭해, 북경 TV 방송국에서는 14강의 『신독사기新讀史記』 강의를 두 번이나 재방송했습니다.
한자오치 교수님께서 ‘사마천과 『사기』’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교수님!
한자오치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더운 날씨에 강연을 들으러 와주셔서 매우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오늘 강의 제목은 ‘사마천과 『사기』’입니다. 앞뒤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강의를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강의 전반부에서는 사마천과 『사기』의 주요 문제를 소개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사기』를 연구하지 않은 분도 계시기 때문에 『사기』에 관한 주요 문제를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사기』의 사상성과 예술성, 사마천의 역사 서술 문제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특히 항우項羽와 이광李廣의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항우본기」와 「이장군열전」이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고, 많은 분이 자주 접하는 편명篇名이기 때문입니다. 항우를 얘기하려면 유방劉邦을 언급해야 하고 이광에 대해 얘기하려면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을 언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기』 속의 많은 인물들에 대해 얘기하게 될 겁니다. 두 그룹의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이면의 사건에 대해 훨씬 구체적으로 얘기하게 될 것입니다.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강의 시간이 두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는 관계로 언급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강연 원고를 가져왔으니 원하신다면 복사해가시면 됩니다.
먼저 사마천과 『사기』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전면의 사진 두 장을 주목해 주십시오. 이것은 섬서성陝西省 한성韓城에 있는 사마천의 무덤입니다. 왼쪽 사진은 무덤의 원경입니다.(PPT를 본다.) 이 패 위의 ‘고산앙지’高山仰止라는 글자는 『시경』에 나와 있는 말로, 높은 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동경하고 앙모하는 걸 비유합니다. 사마천과 『사기』를 숭경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지요. 우측의 이 사진도 사마천의 무덤입니다. 벽돌로 둘러싸여 있고, 오른편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서 있습니다.
아래쪽은 사회자가 말한 『사기』에 관한 책입니다.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출간한 『사기』로 현재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전질입니다. 총 10권이며 ‘삼가주’입니다. 진대晉代 사람 1명과 당대唐代 사람 2명이 붙인 주석인데, 모두 문언문입니다. 아래쪽은 1930년대(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일본 사람이 쓴 『사기회주고증』입니다. 과거 2,000여 년 동안의 중국 『사기』 연구를 집대성한 책으로 상당히 높은 성과를 거둬 일본인들은 이 책을 ‘기념비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국 본토와 대만에서 『사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예외 없이 이 책을 봐야 합니다. 이 책을 보지 않고는 『사기』를 연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대단히 중시되는 책이지요.
그러나 이 책은 출간된 지 이미 70년이 지나 중국에서는 새로운 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이서우이 선생께서는 제게 저작을 당부하셨던 거지요. 그 뒤에 저는 주석과 평론이 있고, 수집한 자료도 비교적 광범위한 『사기전증』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기술적인 문제로 일부 오자가 있었는데 수일 전에 수정을 거쳐 현재 이미 2판이 발행되었습니다.
사마천과 『사기』의 일부 문제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마천의 생애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마천은 한 무제 시대의 인물입니다. 일면 찬란한 시대였지요. TV드라마<한무대제>漢武大帝에서 보이는 바와 마찬가지로요. 동양에서는 서한의 왕조가, 서양에서는 고대 로마 제국이 흥성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렇지만 한 무제는 수십 년 동안이나 대외 전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백성의 고통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봉건주의는 수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기』에서 사마천은 한 무제 시대의 암담한 면을 부각시켜 기록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마천이 살던 한 무제 시대는 눈부신 발전을 이룬 시기인 동시에 백성에게는 고난의 시기였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무대제>라는 TV드라마에서는 찬란한 면만 부각시켰을 뿐 백성의 고통에 대해서는 별다르게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사마천은 뼈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마천 자신의 말을 빌리면, 요순 시대에 그의 조상은 벼슬을 살았고, 하ㆍ상ㆍ주ㆍ춘추전국 시대에도 국가를 위해 공헌한 유명한 조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국시대의 인물인 사마착司馬錯은 진 소왕秦昭王을 도와 사천四川 지역을 병탄했습니다. 사천성은 사마착에 의해 처음으로 중원 정권의 판도 안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이백李白의 시를 잘 알고 있는 분들은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를 아실 겁니다. ‘……촉으로 가는 길은,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 어렵다네. 잠총蠶叢과 어부魚鳧가 나라를 세운 지 그 얼마나 아득한가. 그 뒤로 사만팔천 년 동안 진秦과 내왕 길이 막혔으니…….’ 사천 지역은 48,000년이 지난 사마착의 시대에야 정복되어 중원의 판도 안에 포함되었습니다. 사마천의 조부인 사마근司馬靳은 진나라의 장수 백기白起를 섬겼는데, 동쪽을 병탄할 때 그 유명한 ‘장평대전’에서 조趙나라를 물리친 진나라는 조나라 사람 40만 명을 포로로 잡아 장평에 상매장시켰지요. 역사적으로 상당히 잔혹했던 전쟁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대장군이 바로 진나라의 백기와 사마천의 조상인 사마근입니다. 『사기』에는 진나라에서 시장을 관리하거나 제철을 주관하던 사람들 중에 사마천의 조부와 그의 4,5대조 이상의 조상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마천의 사상과 지식의 형성에서 경제 사상은 매우 탁월한 데가 있습니다. 사마천이 역사가로서 경제 문제를 연구하여 진보적인 견해를 제시한 것은(잠시 후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조상들의 학식이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마천은 어릴 때부터 노동을 했고 자라서는 천하를 주유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노동자와 하층민에 근접해 있지요.
사마천의 부친은 한 무제 때의 사람입니다. 한 무제는 50년 동안이나 황제로 군림했지요. 서한 왕조는 20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한 무제 한 사람이 54년간 재위했습니다. 한 무제 시대 전반기의 사관은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司馬談이었고, 후반기의 사관은 사마천이었습니다. 사마담은 당시의 지식인으로 한 무제 때의 사관이었습니다. 임종 전에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사관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는 네가 유지를 받들도록 하여라. 나는 『사기』를 쓰려고 했다. 이미 착수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했으니 네가 완성하기 바란다. 무엇이 효도이겠느냐? 네가 『사기』를 완성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다.”
이것은 사마천이 『사기』를 쓰게 되는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임무를 부여받은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쓴 지 6,7년째 되던 해에 사마천은 이릉李陵을 두둔한 일로 궁형을 당합니다. 이 일은 사마천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주었지만 사상적으로는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일로 사마천은 봉건 통치자의 속성에 대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궁형을 당한 것은 사마천에게 일종의 자극이 되었던 셈이지요. 화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사마천은 여전히 한 무제의 성은에 감사하면서 봉건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려 했을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기』를 썼더라면 문학적인 수준은 높았을지 몰라도 사상적으로는 별 볼일 없는 수준이었겠지요. 바로 통치자에게 혹독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사마천의 후반기(저서 가운데) 사상은 한층 더 성숙해졌고 시각도 예리해진 것입니다. 노동자에 대해서도 포용력을 지니게 되었고, 통치 계급에 대해서도 보다 확실히 알게 되었지요. 통치 계급에 대한 비판 의식은 ‘24사’二十四史 가운데 가장 날카롭습니다. 2,000년 동안의 중국 고대의 역사서 가운데 사상적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뛰어넘는 책은 없으니까요.
사마천이 『사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객관적 조건에 의해서였지만 한편으로는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그는 더한층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으니까요.
『사기』의 범위와 체제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모두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왕帝王은 본기本紀에, 제후는 세가世家에, 사회 명사나 사회에 크게 공헌한 인물은 열전列傳에 실려 있습니다. 그는 선택 기준은 ‘정의롭게 행동하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억눌리지 않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운’ 인물이었습니다. ‘공을 세워 천하에 이름을 날린 사람’은 사회에, 그리고 후대에 영향을 끼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기』에 실린 사람들에게는 모두 특징이 있습니다. 사마천 자신도 특이한 인물이라 할 수 있지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운’ 인물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사마천이 쓴 책의 성격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사기』는 역사책입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기』는 선진 시대 사서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선진 시대 사서 가운데 가장 저명한 책은 『좌전左傳』입니다. 『좌전』은 역사적 사실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문학적인 수준도 대단히 높은 책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중국의 산문 대가들은 한결같이 『좌전』, 『국어國語』, 『사기』, 『국책國策』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사마천도 『좌전』을 읽어야 했지요. 『사기』는 역사에서 출발했습니다. 반고班固는 『사기』에 대해 ‘문장은 곧고 그 사실은 핵심을 찔러 헛되이 칭찬하지 않았으며 악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실록實錄이라 한다’면서 그 가치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습니다. 역사책은 ‘사실대로 말하면서’ 잘못을 은폐하지 않고, 날조된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노신은 『사기』를 ‘역사가의 절창’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절창’이란 역사적인 가치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나 『사기』는 다른 역사책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의 역사책은 상대적으로 문학성이 떨어지는 반면, 『사기』는 중국 고대의 걸출한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로 ‘인문학’人文學의 서막을 연 작품입니다. ‘인문학’의 효시를 연 사람은 러시아의 작가 고리키였습니다. 중국의 선진 시대에는 전적으로 인물에 대해서만 묘사하는 장르가 없었습니다. 무엇이 인물에 대해 묘사한 것일까요? 현재의 소설이나 희곡, 전기는 모두 인물을 묘사한 것입니다. 선진 시기는 산문, 시가의 시대였지요. 『좌전』에서는 인물과 사건에 대해 묘사하고 있지만, 인물 묘사가 아닌 서사敍事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 문학사상, 의도적으로 인물 묘사에 중점을 둔 최초의 작품은 『사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노신은 『사기』 이후의 당대唐代의 산문, 소위 『당인전기唐人傳奇』나 『당인소설집唐人小說集』을 번역한 뒤 『당송전기唐宋傳奇』라는 소설로 엮었던 거지요. 『이왜전李娃傳』이나 『남태수전南太守傳』 등의 당대 소설은 인물 묘사가 상당히 뛰어난데, 모두 『사기』에서 보고 배운 것입니다. 『사기』를 보면서 비교해 보면 상호 보완ㆍ계승의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지요.
『사기』는 또한 백과전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책입니다. 백과전서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 분야의 지식을 두루 섭렵할 수 있게 도와주어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책을 말합니다. 제가 방금 언급했듯이 선진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사기』를 보아야 합니다. 선진 시대의 문학을 연구하려 해도 『사기』를 봐야 하고, 선진 시대의 군사학을 연구하려 해도 『사기』를 봐야 하며, 선진 시대의 법률이나 중국 고대의 한의학ㆍ천문 등을 연구하려 해도 『사기』를 읽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인 셈이지요. 사마천이 선진 시대의 여러 학문을 연구하고 총정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사기』 「율서律書」는 병법서를 연구한 것으로 고대의 군사 이론과 관계가 있습니다. 「율서」의 내용을 『사기』 속에 등장하는 병법가의 전기와 연결시키면 선진시대 군사사軍事史의 윤곽이 그려집니다. 중국에서 군사 대학을 운영한 적은 없지만 선진 시대의 군사사에 대해 쓰고 싶은 젊은이가 있다면 『사기』부터 공부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기』는 백과전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점은 『사기』가 사마천의 ‘일가언’一家言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일가언’이라고 부를까요? ‘일가언’이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사상과 그 이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계초梁啓超는 한비韓非가 『한비자韓非子』를 쓰고, 동중서董仲舒가 『춘추번로春秋繁露』를 쓴 것은 모두 통치자를 위해 계책을 내놓으려는 거였다고 말했습니다. 노신의 말을 빌리면, ‘처방을 내려 준 것’이지요. 학자나 사상가는 통치자를 위해 계책을 세우고 청사진을 그리며 치국평천하의 경험을 얘기해 주는데, 이것이 바로 ‘일가언’이라는 겁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책이면서 문학서이자 백과전서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어떤 목표에 도달해야 했습니다. 그 목표란 통치자를 위해 계책을 꾸미고 치국평천하의 묘안과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사기』에서 역사를 적은 것은 그저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역사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드러내려는 것이었지요. 사마천은 비판을 하고 칭송을 하면서 자신의 사상이나 견해를 밝혔습니다. 이런 부분을 정리한 것이 바로 사마천의 ‘일가언’입니다. 양계초 선생께서는 『사기』를 읽는 것과 『중국통사中國通史』를 읽는 것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후대 사람이 현대의 역사책을 읽는 것과는 다르다고요. 범문란范文瀾의 『중국통사』와 곽말약의 『중국역사中國歷史』의 관점으로 『사기』를 읽었다가는 잘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사기』를 읽는 것은 곧 사마천을 읽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서 인상여藺相如가 화씨벽和氏壁을 온전하게 조趙나라로 돌려보낸 고사를 통해 우리는 사마천의 사상을 알 수 있습니다. 고사를 통해 치국평천하의 이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사기』를 읽는 것은 사마천을 읽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기』의 학술상 가치와 관련된 문제이지요.
사마천이 중국 고대 역사 연구에 공헌한 점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그는 하ㆍ상ㆍ주의 고대사 개요를 정리했고, 춘추전국 시대의 대체적인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만약 『사기』가 없었다면 중국 역사는 여전히 산만하고 잡다한 상태로 체계화되지 못했을 겁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함으로써 고대 2,3천 년의 역사가 모두 『사기』에 실리게 된 것이지요. 선진 시대에 대해 알려면 『사기』를 읽으면 그만입니다. 『사기』를 읽지 않았다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기』는 일종의 과학적인 것이 되고 말았지요.
둘째, 『사기』에는 진나라 이후의 근대사와 현대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나라가 통일한 지 얼마 안 되어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봉기를 일으켰고, 그 후 유방이 나라를 세워 한 무제에 이르렀습니다. 사마천에게 이 시기는 근대, 현대, 당대當代에 속합니다.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사마천은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상고 시대의 역사를 계승하여 앞부분을, 문서와 자료를 훑어보고 현실의 문제를 이해한 뒤 뒷부분을 자신이 창작해 기록한 것입니다. 참고로 삼을 만한 것이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가치를 훨씬 높이 평가할 수 있겠지요.
작년에 저는 TV방송을 통해 진시황에서 한 무제 시대까지의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해 주로 강의했습니다. 사마천의 역사적 공헌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몇 가지를 열거할 수 있겠지만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오늘날 『사기』의 사상적 의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사마천의 진보적인 민족관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는데, 첫째는 중화민족이 모두 황제黃帝의 자손으로 형제이고 한 가족이라는 점입니다. 현재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상으로, 56개 민족과 이를 상징하는 56송이 꽃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처음 말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사마천입니다. 『사기』의 첫 번째 본기는 「황제黃帝」입니다. 황제는 각 민족의 시조이며 황제릉黃帝陵은 섬서성陝西省 경내에 있습니다. 각개 소수민족의 연원을 캐보면 황제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모두 적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 광동廣東 사람들과 동북의 하얼빈哈爾賓 사람들의 조상이 같을까요?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좀 억지스러운 점이 있긴 하지만 이 문제는 전국 시대의 심리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는 시간적으로 수십 년에서 1백 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는데, 춘추 시대에만도 조상이 같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공자는 ‘양이’攘夷라는 말을 썼는데, 여기서 ‘이’夷는 소수민족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은 광동성과 광서성廣西省이 ‘만’蠻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남성河南省 남쪽의 사람들이 ‘만蠻’이었으니까요. 당시의 견해에 따르면 하남성 북쪽과 산동성山東省 서쪽, 섬서성陝西省 동쪽만이 중원 지역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원 지역이 아니면 공격해야 한다는 게 춘추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었죠. 전국 시대가 되면 사람들의 관념에 변화가 생깁니다. 모두들 자신들이 황제의 자손이라고 다투어 말하게 되었지요. 객관적인 정세가 어떻게 변했기에 모두의 생각이 바뀐 걸까요? 전국 시대는 통일 지향의 시기로 누구나 전국 통일을 꿈꾸었습니다. 훗날 진나라가 통일을 했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나라(산동성)와 초나라(호남성과 호북성) 사람들도 통일을 원했고, 하북성의 조나라 사람들도 통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통일을 바라기 이전에 이들은 먼저 통일을 할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만약 먼 조상이 하나의 민족이고, 그래서 모두가 한 조상의 후손이라면 누구든 통일할 자격이 있는 거겠지요. 그래서 전국 시대에는 그러한 의식이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사기』를 쓰면서 사마천은 전국 시기의 이러한 사상에 흉노족을 끌어들였습니다. 당시 한나라 사람들의 최대 적은 흉노족이었는데, 사마천은 이 흉노족의 조상도 황제라고 말했던 겁니다. 주나라 무왕에게 패한 뒤 상나라 사람들 중의 일부가 흉노족이 되었기 때문에 흉노족도 한족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상나라 사람들 중의 일부만 흉노족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흉노족이 (한족인) 황제의 자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2,0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 보니 모두가 염황의 자손이 된 겁니다.
이 문제는 중국 다민족 간의 우호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자신이 염황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하는 중국인은,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의 자손이냐는 물음에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마천의 이러한 사상은 중화민족의 통일성을 강화하고 결속을 다지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둘째는 사마천의 경제 사상을 꼽을 수 있습니다. 등소평鄧小平 동지가 개혁개방을 추진한 뒤 광동성은 경제 특구가 되었습니다. 모두들 상공업이 발달하기를 희망하면서 상인의 지위가 향상되고 기업주들도 늘어났지요. 30년 전에만도 사람들은 사장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사장님은 자본가를 의미하며, 자본가는 곧 착취 계급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 문제에 대해 ‘공농상우’工農商虞가 모두 중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우’虞은 본래 사냥이나 목축 등을 가리키는 말로 ‘우인’虞人이란 사냥꾼을 의미합니다. 훗날 사냥꾼 이외에도 산림ㆍ호수나 바다ㆍ광산 등의 개발에 뛰어든 사람들도 ‘우인’에 포함되었습니다. 현재에는 사마천의 생각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2,000년 전에는 상황이 사뭇 달랐습니다. 상앙商鞅이 변법을 통해 ‘중농억상’重農抑商을 제창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중농억상’의 ‘상’商에는 공업과 상업이 포함되었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중본억말’重本抑末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봉건 농업 사회에서는 ‘농업을 중시하는’ 국가가 강성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공업 사회가 도래하면서 농업만을 발전시킨 국가는 강대해질 수 없었지요. 현재에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과거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평준서平準書」와 「화식열전貨殖列傳」은 천재적인 경제학 논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 한평생 『사기』를 읽었던 사람(처음 수십 년 동안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도 개혁개방 이후에야 사마천의 경제 사상이 얼마나 탁월한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첫머리에 국력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사마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국력은 경제에 달려 있다고요.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수리 공사를 하고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제齊나라에서 환공桓公이란 인물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요? 상공업을 발전시킨 관중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일찍이 제나라(산동 지방)의 관중 등은 상공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한 나라의 국력은 경제에 의해 좌우됩니다. 유가 사상뿐 아니라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 수십 년 동안에도 이 문제는 간과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력은 무엇에 달려 있을까요? 국력이 무엇에 의존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등소평 동지가 ‘경제 발전’을 부르짖으며 ‘유생산력론’唯生産力論을 제기했지만 사마천은 이미 오래전에 국력이 경제에 달려 있음을 주장했던 겁니다.
그밖에 사마천은 ‘공농상우’工農商虞를 함께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과거 2,000년 동안의 ‘중본억말’ 정책과는 상반된 주장이지요. 한 무제 시대에 상공업자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징병을 하거나 장성을 수축할 때에는 감옥 안의 죄인들이 우선 동원되었기 때문에 고대에는 ‘착한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관례로 굳어진 것은 한 무제 때부터입니다. 착한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았으니, 우선 죄인들이 군인이 되어야 했지요. 그러나 사마천은 ‘공농상우’ 가운데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상반된 주장을 펴면서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모두 다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열전을 통해 사마천은 상공업자들을 칭찬합니다.
여러 대상인을 칭송했는데, 산서성의 백규白圭라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면서 상인이 갖춰야 할 요건을 총괄하기도 했습니다. 즉 훌륭한 상인이나 대상인이 되려면 정치가와 같은 선견지명이 있어야 하고,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는 외교가와 같은 능력이 있어야 하며, 과감하게 용단을 내릴 줄 아는 병법가와 같은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갖춰지지 않고는 대상인이 될 수 없다고 기록했는데, 정말이지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탁문군卓文君의 부친은 원래 조나라에 살았는데 진나라 통일 후 운남성雲南省으로 강제 이주해야 했습니다. 그는 운남성에서 가까운, 사천성 남쪽의 공래邛崍에 도착해 거기서 광물을 채굴하고 제철을 하면서 번성을 누렸습니다. 탁문군의 할아버지는 광활한 서남부 지역 개발에 최초로 공헌한 인물입니다. 현재 희곡의 주제가 되는 것은 탁문군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연애 사건일 뿐 탁문군의 조부가 서남부 지역을 어떻게 개발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연애 얘기보다 훨씬 중요할 텐데도 말이지요.
사마천이 상인에 대해 쓴 내용 가운데 단연 으뜸은 공자의 수제자인 자공子貢에 관한 것입니다. 공자의 애제자는 안회顔回였지만 『사기』를 통해 본 안회는 그저 책벌레였을 뿐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사기』에는 자공의 업적이 가장 많이 실려 있지요. 그러나 공자는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논어』에는 자공이 ‘재물을 좋아했다’고 실려 있는데 어떻게 ‘재물을 좋아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기』에는 그가 물가등락을 예측하는 데 뛰어났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를테면 내일 오를 것 같은 주식을 오늘 급히 사들여 이윤을 남기는 식이었겠지요. 자공에게는 바로 그런 능력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당시에는 주식이란 게 없었지만 어떤 물건의 가격이 오를지 그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던 겁니다. 『논어』에 ‘자공이 재물을 좋아했다’는 구절이 실려 있는 걸로 봐서 공자가 자공을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공자는 안회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자공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았지요. 그런데 『사기』에는 자공에 대한 기록이 비중 있게 실려 있는데, 사마천이 어떤 사료를 참고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마천에 의하면, 자공은 수많은 다국적 기업을 세웠으며, 집을 나설 때는 큰 말에, 큰 가마를 타고 수천 명의 시종을 대동했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에 가든 귀빈으로서 그 나라 군주의 환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공의 스승인 공자가 열국列國을 주유할 때(어느 곳에서나 환대를 받았습니다) 각국의 환대를 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마천은 자공이 스승을 위해 돈을 쓰며 길을 닦아 놓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스승을 잘 대접해야지 박대했다가는 훗날 돈을 빌려 주지 않겠다며 엄포도 놓았답니다. 이 한 마디를 근거로 사마천은 공자에게 슬쩍 농담을 건넵니다. 당신께서 자공을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 제자의 돈이 아니었다면 어디 그런 환대를 받을 수 있었겠느냐고요.
어디까지나 고사일 뿐 사료의 진위 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사마천은 상공업자를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그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풍자했지요.
셋째, 『사기』에는 민주성과 비판성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그 어떤 책도 『사기』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겁니다. 권세와 지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마천은 한나라 황제를 비판했을 뿐 아니라 유방에 대해서도 그다지 존경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항우본기」의 ‘홍문연’鴻門宴을 읽으셨을 테지만, ‘홍문연’을 근거로 사마천은 항우가 대영웅으로서 떳떳하지 못한 방법은 쓰지 않았다며 칭송합니다. 유방을 죽여 없애라고 말을 듣고도 항우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요. 반면에 유방은 항우의 측근을 회유하여 자신의 첩자로 삼는 등 암암리에 광명정대하지 못한 행동들을 합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궁극에는 유방의 장점에 대해서도 기록했습니다. 여러 결점이 있었음에도 유방은 정치가로서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까요.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면서 군사적으로는 융통성 있는 전술을 폈고 용인用人의 달인이자 단결과 화합의 명수였으며, 여러 분야의 인재를 곁에 두었으니, 항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요. 그러나 사마천은 유방의 문제점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굳이 기록해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유방은 항우가 산동성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틈을 이용해 56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주徐州(당시에는 팽성彭城이라고 불렀습니다)를 함락시켰지요. 그리고는 경계를 늦추고 마치 모든 금령이 해제된 것처럼 먹고 마시며 즐겼습니다. 유방 자신이 진종일 먹고 마시며 즐겼으니 부하들은 어떠했겠습니까?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한편 자신의 근거지가 유방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곧바로 정예 기병 3만을 이끌고 팽성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항우는 정면에서 공격하지 않고 군대를 팽성의 서쪽으로 이동시켜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진격하며 유방의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기세를 몰아 일거에 유방의 군대를 섬멸하고자 했던 항우는 사수泗水로 유방의 군대를 몰았습니다. 도주하던 길에 유방은 뿔뿔이 흩어진 아들과 딸을 만나게 됩니다. 마차를 몰던 이가 두 아이를 태우지만 추격을 당하자 유방은 아들과 딸을 마차 밖으로 밀어냅니다. 마차를 몰던 이가,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지만 어떻게 자식을 밀어낼 수 있느냐’고 항변하며 두 아이를 마차에 태우지만 유방은 다시 자식들을 마차 밖으로 밀어내지요. 이 기록으로 유방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위대한 정치가의 이런 점은 쓰지 말아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마천은 그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사마천은 비록 유방의 치부를 폭로하긴 했지만 천재적인 정치가로서의 면모도 기록했습니다. 유방의 손자인 한 경제
우선 ‘오초칠국의 난’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 경제 때에 일곱 제후국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삭번’削藩을 주장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조晁錯입니다. 그는 각 제후국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져 중앙 정부의 권한이 약화되고 있다고 말하며 제후국의 영지를 삭감하여 그들의 권력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삭번’ 정책이 시행되었고, 일곱 제후국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본래 이것은 훌륭한 조치였지만(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한 경제는, 조조를 죽여 일곱 제후국에 사과하면 그들이 군대를 거둘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조조를 ‘희생양’으로 삼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제후국은 군대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퇴위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거죠. 군대를 거두지 않으니 어떻게 했겠습니까? 대장군 주아부周亞夫를 파견해 ‘칠국의 난’을 평정했지요. 주아부의 공로는 황권에 위협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의 명망이 지나치게 높아지자 한 경제는 급기야 주아부를 하옥하기에 이릅니다. 그 죄명은 주아부의 집에서 목각 인형과 나무로 만든 무기가 발견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반을 일으키려 했느냐는 한 경제의 물음에 주아부는 사후 부장품으로 쓰려 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한 경제는 현세에서가 아니라 내세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게 아니냐고 몰아붙였지요. 이렇게 해서 ‘칠국의 난’을 평정한 대영웅 주아부는 죽게 됩니다. 또한 사마천은 한 경제의 황후(한 무제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기록했습니다. 무척이나 교활했다고 적었는데, 그녀는 원래 후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황후가 죽자 한 경제는 황태자(이 사람의 모친도 황후가 아니었습니다)를 책봉했고, 태자의 어머니인 율비栗妃도 곧 황후로 진봉될 터였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환심을 사려 했지만 유언비어를 퍼뜨려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경제의 누이인 대장공주大長公主가 율비를 찾아와 곧 황후로 진봉될 수 있게 해 줄 터이니 황후가 된 뒤 자신의 딸을 며느리로 삼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려는 수작이었죠. 그런데 율씨 부인은 대장공주의 간청을 냉정히 거절합니다. 이에 대장공주는 돌아서서 한 무제의 어머니인 왕씨 부인을 찾아갔지요. 대장공주는 왕씨 부인에게, 율씨 부인이 황후가 되면 너희 모자에게는 희망이 없을 거라 얘기하면서 그대를 황후로, 그대의 아들을 태자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약조했습니다. 그러기를 바라지 않느냐는 물음에 한 무제의 어머니는 당연히 원한다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대장공주는 자신의 딸을 며느리로 맞는 것이 조건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무제의 어머니는 아들이 태자가 되면 틀림없이 며느리로 맞을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이 대장공주의 딸이 바로 아교阿嬌입니다. ‘금옥장교’金玉藏嬌라는 고사의 주인공이지요. 대장공주는 한 무제에게 자신의 딸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무제는 그렇다고 대답했지요. 대장공주는 자신의 딸을 아내로 삼겠느냐고 물었고, 한 무제는 아내로 삼아 금으로 만든 집에 모셔 두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름답게 들리는 이 이야기(성어)는 이처럼 대음모에서 유래했던 거지요. 한 경제의 누나는 암암리에 공작을 펴 마침내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악랄한 두 여인이 합세해 율씨 부인을 밀어낸 거예요. 사실 율씨 부인의 아들은 태자로서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가 얼떨결에 살해되는 바람에 떳떳하지 못하게도 한 무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물론 이 일로 한 무제를 책망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고모와 어머니가 꾸민 음모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역겨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후궁 안 여인들의 대립은 첨예할 수밖에 없었는데, 누군가를 무너뜨리려면 모질게 마음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측천武則天이 그랬던 것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후가 되어야 했어요. 밀려나 도태되는 날에는 평생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고, 심지어는 비명에 횡사해야 했으니까요.
한 무제의 모친은 평범한 후궁에서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승리한 거고 이전의 황후는 불운했던 셈입니다. 후궁이 패배하고 황후가 승리한 또 다른 얘기의 주인공은 여후입니다. 여후를 싫어했던 유방은 척부인을 황후로 책봉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여후는 장량張良과 주위 대신들의 도움으로 척부인을 물리칠 수 있었지요. 유방이 죽자 여후는 척부인의 두 팔과 두 다리를 자르고, 눈멀고 귀먹게 하고, 성대를 파괴하고, 혀를 자르고도 죽이지 않고 측간에 내던져 바르작거리게 한 후 ‘인체’人彘(인간돼지)라고 불렀습니다.
봉건 사회의 투쟁은 매우 격렬했습니다. 모두들 자신을 위해 타인과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했으니까요. 봉건 제도가 초래한 비극이었죠. 사마천은 한나라 황제에 대해 기록하면서 종종 비판적인 태도와 입장을 취했습니다. 유방, 한 무제, 한 경제에 대해 기록했는데, 그 가운데 『사기』에 최악으로 기록된 황제는 한 경제(한 무제의 부친)였습니다. 한 무제 시대에 한 경제와 그의 황후(한 무제의 모친)에 대해 이처럼 형편없이 기록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넷째, 『사기』에는 감동적인 생사관과 가치관이 드러나 있습니다. 『사기』에 실린 인물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지요. 십중팔구가 영웅의 기질을 타고났으며 기회를 엿보아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고자 했다는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현대의 시대적 분위기와도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는 현재 훌륭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국가 발전에 대단히 유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러한 때에 젊은이들은 사회를 위해 공헌을 해야 합니다.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 실중팔구는 국가를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위해 큰일을 했습니다. 사마천은 이들이 진리와 정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사기』에 등장하는 문신과 무신에게는 모두 이러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진시황이나 유방, 장량, 한신 등은 모두 기회를 포착해 공을 세우고 업적을 남겼지요. 어떤 이는 정권을 위해, 어떤 이는 국가를 위해, 그리고 어떤 이는 사업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굴원屈原 등과 같은 사람은 매우 진취적인 사상의 소유자였습니다. 국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았던 인물로는 앞서 언급했던 염파와 인상여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ㆍ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종종 인상여가 적국에 가서 기지가 넘치고 용감하게 사명을 완수한 점이나 염파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가시 채찍을 등에 짊어진 채 인상여에게 사죄한 점, 장군과 승상이 서로 협력해 국가를 위해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은 점을 칭송합니다. 중ㆍ고등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이러한 점을 주지시킬 겁니다. 『사기』에서 사마천이 「염파인상여열전」을 쓴 목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종종 「인상여열전」 마지막 부분의 ‘태사공이 말한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라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라는 구절을 간과하지요. 즉 어떤 사람이 누군가와 사생결단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또 그렇게 할 수 있지요. 다급해지면 누구나 목숨을 걸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어려운 점은 언제 목숨을 걸어야 하고, 걸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겁니다. 인상여는 진나라의 궁궐에서 속임수를 써 화씨벽을 돌려받은 뒤 진나라 왕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화씨벽은 지금 제 손안에 있습니다. 왕께서 신을 협박하시면 제 머리는 화씨벽과 함께 기둥에 부딪쳐 박살이 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겠지요.” 면지澠池에서 양국의 왕이 만났을 때에 진나라 왕은 조나라 왕에게 거문고를 연주하라며 모욕을 주었습니다. 조나라 왕이 거문고 연주를 마치자 인상여는 진나라 왕에게 질장구를 쳐달라고 강요하며, 질장구를 치지 않으면 자신의 머리도 질장구와 함께 박살이 날 거라고 협박했습니다. 결국 진나라 왕은 질장구를 두드릴 수밖에 없었지요. 이러한 때 인상여는 목숨을 내걸었던 겁니다. 시의적절하게도 말이지요. 결국 인상여는 국가의 존엄과 대표단의 존엄 그리고 자신의 인격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까! 이때 설령 죽었다 해도 가치 있는 죽음이었을 텐데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진나라까지 굴복시켰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마천은 인상여의 생사관을 높이 평가합니다. 『사기』에는 힘들고 위험한 시기에 용기 있게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나라를 지키고 자신의 사명을 다한 사람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웅주의를 찬양한 측면이지요.
한편 『사기』에서는 목숨을 가볍게 내던져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한 개뿐이기에 이 목숨을 언제 거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한편으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목숨을 내던질 가치가 없을 때는 사생결단으로 나설 필요가 없으며, 치욕을 참고 목숨을 부지해 사회와 국가를 위해 더 큰 공헌을 하라고요. ‘치욕을 참고 분투한다’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사기』에서 치욕을 참고 분투한 사람들 중에 ‘월왕 구천’에 관한 얘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월왕 구천으로 인해 고배를 마셔야 했던 오왕 부차도 치욕을 참고 분투했던 게 아니겠습니까? 오왕 부차의 아버지인 오왕 합려도 대단히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막강한 적국을 멸망시킬 뻔했으니까요. 훗날 오왕 합려는 월왕 구천의 군대가 쏜 화살에 맞아 숨집니다. 임종 전에 합려는 부차를 불러 아비를 죽인 원수를 잊지 말라고 당부했고, 부차는 잊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부차는 자신의 곁에서 청소를 하거나 보초를 서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릅니다. 매일 아침 옷을 차려입고 문을 나서는 자신과 마주칠 때마다 “부차야, 넌 네 아비를 죽인 구천을 잊지 않았느냐?”며 묻게 했어요. 그러면 부차는 고개를 숙인 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지요.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부차에게 큰 소리로 묻는 사람이 있었으니, 오왕 부차가 복수의 칼날을 가는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부차가 구천을 사로잡자 구천은 거짓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유방의 경우도 이와 다를 게 없었지요. ‘홍문연’에서 유방이 이렇게 나오자 항우는 그를 풀어 주었지만, 몇 년 뒤에 항우는 도리어 유방에게 패해 몰락하지 않았습니까? 오왕 부차도 월왕 구천을 놓아주었습니다. 구천은 귀국하고 나서 몇 년이 지나 부차를 사로잡습니다. 그러자 부차는 예전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한 번만 놓아달라고 통사정을 합니다. 하지만 구천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당시 하늘이 네게 준 기회를 너는 놓쳤지만, 오늘 하늘이 내게 준 기회를 나는 놓치지 않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이때 가장 악독하게 굴었던 사람은 범려였습니다. 월왕 구천은 부차가 보낸 사신이 간절히 강화를 요청하자 부차를 놓아주고 싶어했습니다. 이때 범려가 자신이 해결하겠다며 나섰지요. 범려는 부차가 보낸 사신에게, 구천이 이 문제를 자신에게 맡겼으니 속히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를 붙잡아 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전에 나를 그런대로 잘 대접했으니, 나도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영파寧波의 다섯 농가를 떼어 주어 이후 너를 봉양케 할 것이다.” 이 말에 오왕 부차는 “내 이미 늙어 다시 너를 모시고 싶지 않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에 이처럼 치욕을 참으며 분투한 사람들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저는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가 모두 영웅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왕 부차에게 결점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도 아니고, 그저 거만하고 자만했으며 부주의했다는 점뿐입니다. 서시西施와 관련된 고사는 훗날 사람들이 꾸며 낸 것입니다. 범려와 서시가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지만 훗날 서시를 부차에게 선물로 바치는 바람에 결국 범려가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고 현재 전해지고 있지요. 서시와 범려는 공전의 진취적인 인물로 기록되었는데, 훗날 이런 사람들은 점점 늘어납니다.
요컨대 『사기』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오늘날 교육적으로 상당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초ㆍ중ㆍ고등학교에서 혹은 공산주의 청년단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사상 교육을 시킬 때 이런 사료를 활용하면 좋은 효과를 볼 것입니다. 만년에 모택동 주석은 ‘중국 고대의 위대한 두 저서인 『자치통감』과 『사기』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서 편찬된 것이다. 좌절을 겪는 게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다시 도전하면 최후에는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사기』의 현재적 가치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사기』의 문학성과 결부시켜 「항우본기」, 「이장군열전」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사기』는 역사책이자 문학 작품입니다. 『사기』에 실린 일부 글들은 문학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문학성과 역사성을 근거로 『사기』를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역사성은 높은데 문학성이 높지 않은 부분이 바로 본기입니다. 순수한 이야기일 뿐 역사성도, 문학성도 높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골계열전滑稽列傳」의 제 위왕齊威王 얘기가 그렇습니다. 제 위왕이 국사國事에 관심을 두지 않자 한 신하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밖에 새 한 마리가 있는데 3년 동안 울지도, 날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 그러자 대왕은 “이 새는 날지 않으면 그만이겠으나 한 번 날면 하늘을 찌를 것이고, 울지 않으면 그만이겠으나 한 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뒷날 오자서伍子胥의 조부와 초 장왕楚莊王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오갑니다. 초 장왕이 막 즉위했을 무렵에 황음무도한 생활을 하자 오자서의 조부가 장왕에게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이장군열전」에 실려 있는 고사도 마찬가지 예입니다. 술에 취한 이장군이 길가에서 호랑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일어나서 보니 이장군이 본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돌이었는데, 바로 그 돌에 화살이 박혀 있더랍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는 이와 유사한 얘기가 서너 가지 전해집니다. 『좌전』에도 한 신궁의 화살이 돌을 꿰뚫었다는 기록이 실려 있고, 『사기』에도 이광이 그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요.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름만 바뀌어 새로운 이야기로 거듭 탄생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사가 그 인물의 전반적인 사실에 관한 진실성에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글에는 역사적 진실성과 문학적 과장이 뒤섞여 있게 마련이지요. 문학적 과장은 대개 사소한 내용에 관한 것이고,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했는지, 그리고 누가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는지에 관한 것은 대개 분명합니다. 사소한 내용에서 비교적 허구가 많지요.
이제 이광과 항우에 대해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천이 항우와 이광에 대해 어떻게 기록했고, 이것이 그 후 2,000년 동안 중국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항우본기」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러합니다. 항우가 숙부와 함께 강남에서 거병하여 중원 지역에 도착했을 무렵, 진승과 오광은 죽고 유방은 항우에게 의탁합니다. 항우와 유방은 함께 진 제국의 군대를 물리치지만, 훗날 항우의 숙부 항량項良이 자만에 빠지는 바람에 참패를 당합니다. 이에 항우는 군대를 재정비한 후 병사들을 거느리고 조나라로 향하는 한편 유방을 황하 이남에 보내 섬서성으로 짓쳐 들어가 함양을 함락하도록 하지요. 항우가 북쪽에서 진 제국의 장군 장감章邯을 물리치자 장한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항우에게 투항했습니다. 그런데 군대를 정비하던 중 항우는 유방이 관중關中에 들어가 이미 진 제국의 항복을 받아 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항우는 즉시 행군을 명하여 관중으로 질주했지요. 군대가 낙양洛陽 서쪽의 신안新安에 도착했을 때, 항우는 진 제국의 투항한 20만 대군이 자신들이 학대받고 있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진시황 치하에서 관중 지방은 진 제국의 근거지였는데, 당시 병역이나 노역을 이유로 섬서성을 찾은 다른 지방 사람들은 섬서성 사람들의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섬서성 사람들이 장감을 따라 항우에게 투항을 한 게 아니겠습니까. 이에 그간 핍박을 받았던 사람들이 포로로 잡힌 이들을 학대했던 것이고, 포로들은 자연히 불평을 했던 거죠.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만, 항우는 그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휘하 장군들과 상의한 끝에 신안에 도착한 당일 저녁, 투항한 20만 대군을 생매장했던 거예요. 한편 유방은 관중에 입성한 뒤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발표하면서 과거 진 제국의 무자비한 법령을 폐지합니다.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그에 상응하는 죄값을 치르게 한다’는 게 약법삼장의 주요 내용이지요. 지극히 간단한 3가지 법령만 남겨 놓은 셈이에요. 이 일로 유방은 백성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항우가 관중에 입성한 뒤에는 너무도 유명한 ‘홍문연’ 사건이 벌어지지요. 범증范增의 건의를 받아들인 항우는 이튿날 새벽에 유방을 공격하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항우의 당숙 항백項伯이 장량을 찾아가 항우가 유방을 없애려 한다는 기밀을 누설합니다. 장량에게 이끌려 유방을 만나 본 항백은 결국 유방에게 매수되고 말지요. 다음 날 항우의 군영으로 돌아온 항백은 유방이 항우와 대적할 생각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유방 역시 항우를 보자마자 항백이 했던 말과 같은 얘기를 하지요. 자신은 항우에게 대적할 뜻이 전혀 없는데 누군가가 자신들을 이간질하고 있다고요. 그러자 항우는 무장을 완전 해제한 후 연회석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때 범증이 항장項莊을 불러 검무를 추다가 유방을 죽이라고 명하지만 장량의 대처로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홍문연’ 사건이지요.
뒤이어 항우는 제후왕을 봉했습니다. 유방을 관중왕에 봉하는 게 마땅했으나 항우는 자신에게 불리해질 거라 여겨 유방에게 사천성과, 추가로 한중漢中 땅을 떼어 주었습니다. 한편 항우는 투항했던 진 제국의 두 장군을 각각 옹왕雍王과 새왕塞王에 봉해 유방의 북상을 막았습니다. 비교적 세심하고 치밀한 계획이었지요. 그리고 나서 항우는 서주(팽성)로 돌아가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유방은 불과 3개월도 안 되어 관중 지역 대부분을 수중에 넣고 섬서성을 점령했습니다. 이때 항우에게 두통거리가 생겼습니다. 항우가 비록 유방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천하를 불공평하게 분봉했다는 이유로 장수들이 불만을 품었던 거예요. 좋은 영지는 자신의 심복 장수에게 떼어 주고 좋지 않은 땅을 남에게 분봉했다며 몇몇 장수들이 항우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반란은 하북성과 산동성 두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북성의 진여陳餘는 항우와 갈등이 있었던 데다 항우를 따라 함양으로 향하지도 않았던 인물입니다. 산동성의 전용
훗날 유방이 한신을 죽인 것은 이 빚을 갚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해하에서 항우와 대결한 주력 부대는 한신이 이끈 10만 대군이었고, 유방은 후속 부대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항우의 병력은 10만에 불과했지요. 한신이 이끈 30만 대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항우를 공격했습니다. 좌우 양측의 부대가 정면으로 공격해 항우의 군대 10만 명을 에워싸자 한신이 퇴각을 멈추고 반격하여 항우 군대를 대파했습니다. 항우는 결국 수백여 잔여 병력과 함께 해하에서 포위되고 말았지요. 다음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사면초가’에 관한 얘기입니다.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울려 퍼지자 항우는 슬프고도 격정적인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를 듣은 우희와 부하들은 매우 비통해하지요. 그리고 마침내 항우는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는데, 유방은 날이 밝은 후에야 항우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에 유방은 5천 기병을 보내 항우를 뒤쫓게 했고, 항우의 군대는 겨우 28명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 28명이 5천의 기병과 대적했던 겁니다. 항우 등이 네 조로 나뉘어 산꼭대기에서 내려와 집합했을 때에는 불과 두 명이 줄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강 기슭에 이르렀지만 유방의 군대는 여전히 뒤쫓고 있었습니다. 항우가 크게 한번 호통을 치자 유방 휘하의 한 장수는 본인은 물론이고 타고 있던 말까지 놀라 몇 리를 도망쳤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때 오강의 정장亭長이 나룻배를 대면서 항우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강동 땅이 비록 넓지는 않으나 유방을 따돌릴 수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건너가면 권토중래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항우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돌아갈 수 없다네. 이 몸이 강동 자제 8천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넜으나 이제 살아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네. 무슨 낯으로 강동의 어르신을 뵙겠는가?” 결국 항우는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자 유방의 부대는 항우의 시신을 먼저 차지하려고 떼거지로 달려듭니다(항우의 시신을 가져오는 자에게 1천금을 상으로 내리고 만호후萬戶侯에 봉한다는 유방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항우의 시체는 여러 조각으로 찢겼고, 그것을 빼앗으려고 서로 칼부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유방이 항씨 성의 사람들을 다수 제후왕에 봉한 것은 그들이 유방의 첩자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몇 가지 문제를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항우는 기골이 우람하고 장대하며 기개가 범상치 않은 영웅호걸입니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항우를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지요. 그럼, ‘홍문연’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홍문연’은 신빙성이 높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동맹군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고 있을 때는 내부적으로 갈등이나 마찰이 있더라도 서로 협조하게 마련입니다. 소련과 미국, 중국이 협력했던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지요. 갈등과 마찰이 있더라도 단결과 협력이 불가피하니까요. 그러나 일단 공동의 적이 타도되면 두 동맹군은 팽팽히 맞서는 적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히틀러를 없애자 소련과 미국은 곧바로 냉전 상태로 돌입했을 뿐 아니라 수시로 무력전이 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비치지 않았습니까? 두 동맹군이 적대적 모순 관계로 바뀔 때에는 전환점이 있게 마련이지요. 이때 양측은 서로 음모를 꾸미지만 그 활동은 극비리에 이루어집니다. ‘홍문연’에 창작이 가미되지 않았다면, 극비리에 이루어진 항우나 유방의 계획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홍문연’에 관한 사마천의 기록은 소설가나 극작가가 두 가지 일을 객관적으로 열거해 놓은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마천은 분명히 항우의 편에 서서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마천은 항우를 호방하고 솔직하고 인자하며 음모를 꾸미지 않는 공명정대한 인물로 그리고 있지만 유방에 대해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록했지요.
여러분께서는 당시의 정세를 어떻게 파악하고 계십니까? 항우는 유방을 죽이려 했을까요? 죽이려 했지요. 유방도 항우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죽이냐는 거였습니다. 범증의 제안대로 당시 항우가 이튿날 아침에 출병을 했더라면 유방을 없앨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항우에게는 40만 대군이 있었고, 유방에게는 10만의 병력이 전부였지만 당시의 지리적인 상황은 유방에게 훨씬 유리했습니다. 게다가 유방은 관중에 들어온 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관중 백성은 유방이 관중왕이 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을 할 지경이었습니다. 항우는 유방이 관중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관중으로 향했습니다. 누구든 먼저 관중에 들어간 자가 관중의 왕이 된다는 초 회왕의 약속 때문이었는데, 항우는 그 관중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겁니다. 낙양 서쪽에 도착했을 때 항우는 투항했던 진 제국의 20만 대군을 생매장하기까지 했습니다. 관중 백성의 자제 20만 명이 생매장된 거예요. 관중 지역의 총인구가 약 3백만 정도였고, 전국의 인구가 2,3천만이 못 되던 시절의 얘깁니다. 한나라 태평성대 시절의 전국 총인구가 대략 5천만 명이었으니까요. 초한전쟁 당시 섬서성의 인구는 기껏해야 2,3백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20만 명의 관중 자제를 생매장한 것은 관중 지역 총인구의 1/10을 생매장했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입니다. 항우는 관중 지역 백성의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셈이죠. 시기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불리했을뿐더러 민심까지 이반한 상황에서 항우가 싸움을 벌였다면 유방을 물리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사로잡지는 못했을 겁니다. 따라서 당시에 항우는 공격을 원치 않았던 게 아니라 공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방은 곰곰이 따져 봐야 했습니다. 항우를 공격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데다 위험천만했기 때문에 유방이 타협을 생각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시기적으로나 지리적인 측면 때문에 항우도 타협을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두 사람 모두 타협할 생각이 있었으리라는 점입니다. 관건이 되는 문제는 유방이 관중을 양보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유방이 관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면 항우도 굳이 유방을 없애지 들지 않을 테니까요. 유방은 관중을 양보하면서 관중 땅을 차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노라고 말합니다. 항우에게는 매우 듣기 좋은 말이었지요. 비록 사마천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유방이 관중 지역을 양보하려 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말이 되는 얘기입니다. 이런 생각은 중경重慶 담판을 보고 하게 된 것입니다. ‘중경 담판’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은 서로 양보해 타협을 보았습니다. 이때 모택동은 충분히 양보했습니다. 국민 혁명군 육군 신편 제사군이 남경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에도 철수했으니까요.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쌍방은 그 전쟁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부터 고려해야 합니다. 유리할 게 없으면 타협을 보아야 하지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유방과 항우에게는 타협의 가능성이 있었으며, 이것이 사건의 본질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사마천이 홍문연에 대해 과장되게 묘사한 탓에 유방은 꼼수를 쓰는 사람이 되었고, 항우는 공명정대한 사내대장부가 되었습니다. 뒷날 항우가 유방에게 패한 것을 훗날 사람들이 동정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홍문연’에 대한 사마천의 기록 때문입니다.
옛사람들의 견해는 어떠했을까요? 청나라 때 시인 정판교鄭板橋는 다음과 같이 읊조린 바 있습니다. ‘신안에서 진의 병사들을 생매장하고 패상에서 유방을 어찌 죽이겠느냐.’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저질러 놓고 어떻게 유방을 죽일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명나라 때의 한 시인은 민간 가요를 지어 항우가 평생 동안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이지 않은 일만큼은 잘한 거라고 읊조렸습니다. 만약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였다면 항우는 끝장이 나도 진작에 끝장났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중경 담판에서 장개석이 장학량張學良을 대하 듯 모택동을 대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은래周恩來 총리가 보호를 잘한 덕일까요? 중경의 모주석에게 호위대를 붙여 준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터인데요. 그러므로 이 문제의 관건이 되는 자는 장개석입니다. 두려운 것이 너무 많았던 탓에 감히 그럴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장개석은 미국인이나 영국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고, 부하인 이종인李宗仁과 하응흠何應欽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도 두려웠습니다. 항우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부하와 제후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걱정을 했던 거예요. 항우가 유방을 괴롭히기 전, 그러니까 서주로 돌아왔을 때에 많은 지방에서 항우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제후들을 일벌백계로 다스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홍무연’에 매우 생동감 있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항우와 잔여 병력 백여 명은 해하에서 포위되었습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뒤덮으나, 불운하여 명마마저 달리지 않는구나. 명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 거나, 우희여 우희여 너를 어찌할 거나.’ 저는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이 항우가 아닌 사마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마천이 항우를 위해 비분강개한 노래를 부른 것이며, 비극적인 영웅호걸의 말로를 묘사하는 데 이 노래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만약 항우가 대패한 후 격정적으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저 대패한 것으로 끝맺었더라면 항우는 특별할 게 없는 영웅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누가 이 노래를 들었을까요? 사마천에게 이 노래를 일러 준 사람이 누굴까요? 노래의 출처를 밝힐 수 있겠습니까? 밝힐 수 없습니다.
청나라 때 주량공周亮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해하에서 어떤 상황이었는가? 우희는 죽고 고향의 자제들은 흩어졌으며 말 한 필에 의지하여 도주하다가 늪지에서 길을 잃었는데 도대체 어느 겨를에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른단 말인가. 설령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고 해도 누가 들어 기록했단 말인가. 따라서 내 생각에 이 부분은 그런 사실이 정말 있었는지 여부를 떠나 틀림없이 태사공 사마천의 필력이 창조한 것으로 항우의 정신과 심정을 생동적으로 대변해준 것이리라.” 전쟁 통에 어느 누가 항우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누가 사마천에게 그 노래를 일러 주었겠습니까? 주량공은 항우의 노래는 ‘사마천의 필력이 창조한 것으로 항우의 정신과 심정을 생동적으로 대변해준 것이다’고 보았습니다. 만약 사마천이 아무런 언급도 없이 항우가 죽었다고만 기록했더라면 영웅적인 이미지가 충분히 부각되지 못했을 겁니다. 이 노래를 통해 항우의 정신과 기개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노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한편 자객 형가荊軻는 역수易水의 송별연에서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하고 비장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가운데, 대장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리.’ 마지막 두 구절이 없었다면 형가라는 사람의 성격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사마천은 한 사람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또한 항우가 스물여덟 명의 기병을 이끌고 도주하면서 유방의 5천 정예부대와 격전을 벌이고도 스물여섯 명이 살아남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항우 자신도 인원을 파악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포위되어서도 태연자약했다고요? 심지어 항우가 호통을 한 번 치자 유방 휘하 장군 하나는 본인은 물론이고 타고 있는 말까지 놀라 몇 리를 도망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지연의』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사실은 「항우본기」의 내용을 모방한 것이지요. 장비張飛가 크게 호통을 치자 조조의 부하가 놀라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내용은 『사기』에서 따온 겁니다.
오강의 정장이 나룻배에 오르라고 권했으나 항우는 ‘강동의 어르신을 뵐 낯이 없다’며 배에 오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두목杜牧은 항우를 힐책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 건너 동쪽에는 준걸이 많거늘, 권토중래는 미지수가 아니었을까.’ 반면에 이청조李淸照는 ‘살아서는 인걸이오, 죽어서도 귀신 중의 영웅이라. 끝내 강동으로 피신하지 않았던 항우, 나는 그를 지금까지도 그리워한다네’라고 읊었습니다. 실제로 이청조가 이 시를 쓴 이유는 진회秦檜와 송 고종宋高宗을 꾸짖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얘기하기 마련이니까요. 사마천은 이 앞부분에서 ‘항우는 더 이상 도주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다’고 몇 마디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스물여덟 명이 5천의 정예부대를 상대로 백병전을 벌이며 결사적으로 싸웠던 거지요. 사마천이 항우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 것은 어떤 목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해하 전투에서 한신이 이끈 30만 대군은 항우의 10만 군대를 단시간에 무찔렀습니다. 항우에게는 잔병 수십 명만이 남아 있었는데, 최후에 항우가 자살한 것인지, 어지럽게 날아온 화살에 맞아 숨진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패잔병들 사이에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항우가 어떻게 죽었다고 해야 후세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동시에 그의 영웅적인 성격을 부각시킬 수 있을까요? 항우가 호통을 한번 치자 유방 휘하 장군 하나는 본인은 물론이고 타고 있는 말까지 놀라 몇 리를 도망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죽은 것으로 끝내기에는 미흡했기 때문에 항우가 침착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던 겁니다. 얼마 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량검亮劍』에서 매우 감동적인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병대가 일본군 부대에게 패해 10명이 살아남자, 기병대 중대장은 이들에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기병대는 달려들어 일본군과 결사적으로 싸웠고, 그 결과 3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러자 기병대 중대장은 또다시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마지막으로 한 명이 살아남자 다시 ‘돌격’을 명령했습니다. 이런 방법은 의도적이건 의도적이지 않건 「항우본기」의 내용을 모방한 것으로 인생관이나 가치관 문제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몇 마디 하겠습니다. 사마천은 오강의 정장이 나룻배를 대었다고 말했습니다. 목숨을 건질 방법이 있었는데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요?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도대체 배는 있었을까요? 배에 오르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오르고 싶었지만 오를 수 없었던 걸까요? 사마천은 오르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그 이유는 강동의 어르신을 뵐 면목이 없기 때문에 전사하고자 했다는 겁니다. 바로 이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항우의 인생관이나 인격이 드러나게 됩니다. 항우가 강동에 가지 않은 것은 자신의 부하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항우는 죽음을 택함으로써 자신을 따랐던 병사들에게 보답했던 것입니다. 죽음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사업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죽음을 택함으로써 자신을 지지했고 옹립했던 백성에게 답례했던 것입니다. 죽음을 택함으로써 2천 년 동안 역사를 읽어왔던 수많은 독자들에게 감사했던 것입니다. 항우의 자결은 사마천이 강조했던 ‘죽음이란 기러기 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고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에서 말한 바로 그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최소한 이런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사마천이 글을 쓰는 방법입니다. 사마천은 항우를 동정했기에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만약 사마천의 처지와 지위가 반고班固나 다른 예술가와 같았다면 항우의 죽음에 대해 비교적 간단하게 기록했을 겁니다. 항우가 해하에서 한신에게 대패한 후 패잔병을 이끌고 강기슭까지 도망쳤지만 싸움에 져서 죽었다는 식으로 끝맺었을 겁니다. 오직 사마천만이 항우의 죽음을 이렇게 멋지게 묘사할 수 있었던 거죠.
이광에 대해서는 간단히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사마천은 이광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천이 이광에 대해 기록한 내용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이광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것을 자세히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천은 이광과 위청, 곽거병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위청과 곽거병에 대해서는 폄하하여, 이광에 대해서는 추어올려 기록했지요. 위청과 곽거병에 대해 쓸 때에는 위청을 추어올리고 곽거병을 폄하했습니다. 즉 위청을 높이 평가하고 곽거병을 낮게 평가했던 것입니다. 사실
『사기』에 기록된
이광과 위청, 곽거병은 총 네 차례 함께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이광이 이끈 군대가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을 때 위청의 군대는 어떠했을까요? 위청은 군대를 거느리고 외몽골의 울란바토르까지 진격해 흉노족의 근거지를 불태우고서야 돌아옵니다.
두 번째 출정에서, 이광의 군대는 출병했지만 적을 만나지 못해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지만, 위청은 감숙성의 회랑 지대를 평정합니다.
세 번째 출정에서는 어땠을까요?
네 번째 출정에서,
당시唐詩에는 많은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달빛은 침침하고 기러기는 높이 나는데 흉노의 왕 선우가 밤에 도주하네. 경기병을 보내 추격하려 하지만 큰 눈이 내려 활과 칼을 다 덮네.’ 이것은 위청의 고달픈 전투에 관해 적은 것입니다. 곽거병은 울란바토르의 언연산嫣然山까지 진격하여 그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고, 자신의 공덕을 돌에 새겨 넣었습니다(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래서 저는 사마천 개인의 주관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마천이 위청과 곽거병을 혐오했던 것은 사마천 자신이 한 무제의 흉노족 정벌 계획에 반대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마천은 한 무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장군들조차 눈에 거슬렀던 것이죠. 당시에 위청과 곽거병의 지위는 대단히 높아 승상을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자로서 전쟁을 그만두도록 한 무제를 설득한 적이 없습니다. 사마천은 곽거병을 특히 싫어했습니다. 이광이 나중에 자살한 것은 위청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기에 이광이 자살한 후, 그의 아들 이감李敢은 위청을 흠씬 두들겨 패 주었습니다. 그런데 위청의 조카인 곽거병이 훗날 사냥을 하면서 이감李敢을 활로 쏘아 죽인 겁니다. 하지만 한 무제는 곽거병을 감싸 주며 이감이 사슴의 뿔에 받혀 죽었다고 하지요. 당시에 이감은 현재의 부장급 간부에 상당하는 낭중령郎中令이었습니다. 낭중령이 곽거병의 화살에 맞아 숨졌는데도 한 무제는 추궁 한 마디 하지 않고 도리어 곽거병을 비호합니다. 그러니 사마천이 위청과 곽거병에게 호감을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실사구시에 입각해 사마천은 위청과 곽거병이 한 무제를 위해 흉노족을 정벌한 진정한 영웅이었다고 얘기합니다. 중국의 영토가 이렇게 넓어진 것은 위청, 곽거병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곽거병은 젊고 유능했으며 18세부터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워 20여 세의 나이에 요절한 인물입니다. 사마천은 위청과 곽거병 두 장군을 지나치게 폄하했습니다.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지요. 이 두 인물을 높이 평가해 중국의 명장,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번역: 서아담